계릉의 전투

다리 잘리고 발분(發奮)한 손빈(孫臏) 2007.03.04 16:30:13
생몰년 모두 불확실하다. 다만 활동 연대가 맹자(孟子) 장자(莊子)와 비슷하며 변법가이자 냉혹한 법가 사상가로 유명한 상앙(商鞅)과도 비슷하거나 10~20살 정도 어릴 가능성이 있다.

그의 본명은 알 수 없으니 孫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姓이지만, 빈(臏)은 이름이 아니라, 그가 得罪를 하여 무릎 이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절름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손빈이란 손씨라는 성을 지닌 다리 잘린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군사전략가로써 전하기를 공자(孔子)와 활동연대를 같이 하며 오자서와 함께 오국(吳國)을 패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춘추말기 때의 저명한 군사전략가 손무(孫武)의 후손이라 한다. 태생지는 전국시대에는 제국(齊國)에 속한 阿와 鄄 사이 지방이라 하니, 이곳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양곡현(陽穀縣) 아성진(阿城鎭)과 견성현(鄄城縣 북쪽 일대에 해당한다. 일찍이 제 위왕(齊威王)에게 등용되어 군사(軍師)가 되어 고국인 齊나라가 계릉지전(桂陵之戰)과 마릉지전(馬陵之戰)에서 위국(魏國)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고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기록한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최근에 山東省 임기현(臨沂縣)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견되고 발굴된 서한묘(西漢墓) 출토 손빈병법(손빈병법) 죽간(竹簡)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괴리에 대해 지금은 많은 이가 죽간 손빈병법(孫臏兵法)이 저록(著錄)된 연대가 사마천의 사기보다 반세기 이상을 앞선다는 점을 주목해 이에 더 많은 신뢰를 주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손빈(孫臏)은 누구인가?

우선 史記 중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첨부된 그의 행적은 대강 이렇다.

손빈(孫臏)은 어릴 때 귀곡자(鬼谷子)에게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재빨리 위국(魏國)으로 가서 벼슬을 해서 그 혜왕(惠王)에게 등용되어 장군이 되었다. (필자 註 : 이 惠王이란 인물은 맹자 첫 대목에서 不遠而千里하고 달려온 맹자에게 “하필 이익만 말씀하십니까”라고 개쪽을 당한 그 인물이다. 魏國은 이 당시에 대량<大梁>이란 곳에 도읍한 까닭에 梁이라는 국호로도 불렸다) 하지만 손빈이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시기한 방연은 齊國에 있던 손빈을 魏國으로 끌어들여 혜왕에게 발탁케 하고는 그를 모함하기를 “齊國과 몰래 통한다”고 했다. 이에 得罪한 손빈은 두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은 것은 물론 면상(面上)에는 죄인임을 표시하는 묵글씨를 지져 새기는 묵형(黥形)도 아울러 받았다.

이런 암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손빈은 고국 제나라에서 大梁으로 사절로 온 사신을 몰래 찾아가 구제를 요청하니, 이에 사신이 그와 대화를 나누가가 그가 인재임을 알고는 몰래 그를 빼돌려 제국으로 데리고 갔다. 그를 주목한 이는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였다. 이 당시 제국(齊國)은 이미 강태공(姜太公)에게서 시작하는 강씨(姜氏)시대가 전씨(田氏) 왕조로 교체된 지 오래라, 전기(田忌)는 그 성으로 보아 왕족에 속할 것임은 분명하다.

역시 그의 재능을 알아차린 전기는 손빈을 賓客의 신분으로 추숭하니 손빈 또한 主君을 위해 충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군 전기는 어떤 인물인가? 사기에 이르기를 그는 도박광인 ‘타짜’라, 어느날 제국의 公子들과 돈을 걸어 수레 경주 놀이판을 벌였다. 손빈은 쌍방 수레 세 대씩을 관찰하건데 그것을 끄는 말은 상 중 하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거니와 각각의 등급끼리 경주를 맞붙을 경우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했다. 이에 손빈은 전기에게 이런 내기 방식을 제안한다.

“장군이 가진 가장 뒤처지는 수레는 상대방의 가장 빠른 수레와 맞장을 뜨게 하시고, 장군의 가장 좋은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 그리고 장군의 중간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붙이십시오.”

이리하여 3 대 3으로 붙은 경기 결과는 2 : 1로 전기(田忌)가 승리했다.

이에 감복한 전기는 손빈을 제 위왕에게 천거했다. 이 면접시험에서 발탁되어 손빈은 일약 군작전 최고 참모인 군사(軍師)가 되어 이후 평생과 같이 주군인 전기(田忌)를 보좌하게 된다. 그를 발탁하고 천거한 전기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이 마치 손빈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바보처럼 그리지만, 내 보기엔 진정 위대한 인물은 손빈보다는 이 전기라는 사람이다.

애니웨이, 장군 전기-군사 손빈이라는 투 톱 체제가 가동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이 군대를 출동해야 할 일이 생겼다. 위국(魏國)이 조국(趙國)을 대대적으로 침범한 것인데, 백척간두에 밀려 수도 한단(邯鄲)까지 함락 일보 직전에 몰린 조국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리하여 제국은 구원군을 파견하게 된다. 애초에 위왕은 손빈을 장군에 임명하려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전기를 장군, 손빈은 군사로 삼되 손빈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도록 수레에 숨겼다. 이는 조국(趙國) 정벌에 나선 위국(魏國) 장수가 방연이며, 나아가 그가 孫臏을 누구보다 잘 알 터이므로, 허를 찌르기 위해 손빈 스스로가 은닉을 자청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병신이 된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가 쪽팔려서 그러했을 가능성도 내칠 수는 없다. 다만, 후자보단 전자에 혐의가 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바보 같은 전기, 한단으로 곧바로 돌진해 조국을 구원하려 하나, 손빈이 막아선다.

“상대방의 허점을 쳐야 싸움은 이기는 법. 지금 위국 대량에는 전쟁 통에 노약자만 남아있을 뿐. 한단보단 대량을 치면 본국을 지키고자 방연은 군사를 몰아 돌아올 것입니다.”

이 전략은 멋지게 성공해 위군은 함락 일보 직전의 수중에 두었던 한단을 포기하고 귀환한다. 이를 계릉(桂陵)에서 기다린 제군(齊軍)은 위군을 대파하니 이를 계릉지역이라 부른다. 이 전술은 나중에 모택동(요즘은 마오쩌뚱이라 한다. 뚱뚱!!)

13년 뒤, 이번에 위국이 원수로 지내던 조국과 합세해 한국(韓國)을 공격했다.(韓-魏-趙 3국은 춘추시대 중원을 차지한 최강국 진<晉>을 3氏가 나눠먹기 해서 생긴 것이라 해서 흔히 삼진<三晉>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이 때도 제국은 전기를 대장, 손빈을 군사로 삼아 위국 수도인 대량을 친다. 이에 한국 정벌에 나선 방연은 포위를 풀고 귀국길에 오른다. 손빈은 이때야말로 방연을 잡을 때라고 생각하고는 계책을 꺼낸다.

“숙영지를 옮길 때마다 부뚜막 숫자를 절반씨 줄이소서.”

기대한 대로 방연은 제군을 추격하다가 거기에 도망병이 많이 생겼다고 생각하고는 이동속도가 현격히 떨어지는 보병을 뒤로 제쳐두고 기병과 정예부대만을 이끌고 마릉(馬陵)이란 곳까지 제군을 추격하게 된다. 이곳은 길은 좁고 양쪽은 험안 산이 들어선 이른바 死地. 손빈은 마릉 계곡 옆 큰 나무를 골라 껍지를 벗겨낸 다음 그 하얀 속껍질에 이렇게 썼다.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

제군은 방연이 들이닥치기를 기다려 양쪽 협곡에 활과 노수들을 집중배치해 결국은 위군을 몰살케 하는 대 전과를 올렸다. 이에 방연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것이 사기에 기록된 대강이다. 한데 이런 기록에서 석연치 않은 대목이 발견된다.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에서 방연이 똑같이 당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계릉 전투에서는 그랬을지 몰라도, 13년 뒤에 벌어진 마릉 전투에서도 똑같이 당했다고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13년 전 교훈을 살린다면 대량에다가 적어도 최소 군대를 주둔시켜 두고 방연은 한국 정벌에 나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빈병법 죽간에는 마릉전투가 없고 저런 사기에 기록된 일들은 모두 계릉전투에서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나아가 방연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암튼 손빈병법 죽간 쪽이 여러 모로 보아 더 합리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계릉전투 이후 손빈은 어떻게 되었는가?

戰國策 중 제나라와 관련한 유세객들의 이야기를 다룬 제책(齊策)에는 그 일단이 엿보인다. 이에 의하면, 손빈의 주군인 전기는 제국 재상 추기(鄒忌)와 권력 투쟁을 벌인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쿠데타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손빈은 전기를 향해 쿠데타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기는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추기가 선수를 치자 전기는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초국(楚國)으로 망명한다. 손빈은 이 때 죽었거나, 아니면 전기와 함께 초국 망명길에 올랐을 것이다.

史記 전제세가(田齊世家)에 의하면 이렇게 도망친 전기는 제에서 위왕이 죽고 선왕(宣王)이 즉위하자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손빈이 어떠했는지는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전기의 쿠데타를 계기로 손빈은 전기와는 갈 길을 달리한 듯하다.

漢書 藝文志에는 “齊孫子 89篇 ”을 거론했다. 제국의 손자라는 뜻이니 이는 손무가 아니라 손빈병법을 지칭한다. 이것이 은작한 한묘에서 출현한 셈이다. 하지만 한서 예문지 이후 손빈병법은 어찌된 셈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사라지는 바람에 손빈은 실은 孫武와 같은 사람이며, 그의 저서란 것도 실은 손무의 저서인 손자병법과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 횡행하게 된다. 이런 막가파식 주장은 실증사학이 판을 친 일본 학계에서 주도적으로 제기되곤 했는데, 이런 사정은 한국고대사라고 진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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