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직전신장 (오다 노부나가)

일본의 전국시대 힘있는 영주들이 영토를 늘리려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1534년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織田信長)는 오와리에서 노부히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고야의 성주로 살았는데 어릴적 기발한 생각이 많아 엉뚱하게 행동 하였다.

사람들은 [오와리의 멍청이]라 불렀다.

1551년 노부히데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지위를 동생 노부카쓰가 이어받았다.

1553년 미노의 사이토 도산(제등도삼斎藤道三)은 노부나가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사위로 맞아들여 노부나가는 노와 결혼 하였다.

노부나가는 동생과 전쟁을 벌여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계략으로 병이난척 하며 노부카쓰가 병문안을 오자 죽인 것이다.

시바타 가쓰이에(시전승가柴田勝家)는 노부나가를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뛰어난 무장이기에 거두어 들였다.

노부나가가 무력으로 쓸어 오와리를 통일 하였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금천의원今川義元)가 오와리에 쳐들어 왔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를 영지로 갖고 있는 영주로 군사 3만을 몰아왔다.

노부나가의 군세는 겨우 5천 밖에 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적의 대장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기습을 하여 요시모토를 죽였다.

요시모토군은 패하여 달아나고 말았다.

이 전투를 오케하자마 전투라 한다.

이마가와 가문이 패배후 쇠락 하였는데 1561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송평원강松平元康 :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미카와에서 독립 하였다.

미카와 태생인 그는 1543년 생이고 인질 생활을 하다가 어릴적 노부나가와 친하게 지냈었다.

모토노부에서 요시모토의 이름을 따 모토야스로 바꿨었는데 이마가와가와의 관계를 끊기위해 이에야스로 개명 하였다.

1566년에는 성도 도쿠가와로 바꾼다.

 

 

 

 

 

 

1556년 사이토 도산은 아들인 요시타쓰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 하였다.

1561년 요시타쓰가 죽고 사이토 다쓰오키(斎藤龍興)가 영주가 되었는데 무능한 인물 이었다.

노부나가는 미노를 점령하기 위해 미노 북부의 아자이 나가마사(천정장정浅井長政)와 손을 잡았다.

노부나가는 여동생 이치를 아자이가에 시집보내 유대를 강화 하였다.

나가마사의 아버지 히사마사는 롯카쿠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의 가신들은 반란을 일으켜 재능이 뛰어난 나가마사에게 영주의 자리를 주었다.

노부나가는 전략적으로 주요한 지점에 기노시타 도키치로(목하등길랑木下藤吉郞)에게 진채를 짓게 하였다.

도키치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37년 오와리국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투에는 뛰어나지 않지만 노부나가가 시키는대로 뭐든지 해내어 신임을 얻었다.

노부나가의 짚신을 따듯하게 품거나 전쟁을 나갈때 노부나가의 말고삐를 잡고 달렸다.

머리는 비상하게 잘 돌아갔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생김새는 원숭이 같이 생겼고 경박하게 행동했다.

사이토군을 잘 막고 전략적 거점에 진채를 완성하자 노부나가는 도키치로를 칭찬 하였다.

“이봐 원숭이! 고생했다. 너의 이름이 가벼우니 내가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마. 너의 어릴적 이름이 히요시마루 였으니 내 아버지의 노부히데에서 한글자를 따 히데요시라 하겠다.”

“감사합니다. 주군!”

 

 

 

 

 

 

 

 

 

1561년 미노에 쳐들어온 오다군을 탁월한 전략으로 막아낸 젊은 장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다케나카 시게하루(죽중중치竹中重治)이다.

다케나카 한베(죽중반병위竹中半兵衛)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게하루와 히데요시가 여러번 싸웠으나 번번히 기노시타가 패하였다.

영주 다쓰오키는 주색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아 시게하루가 몇번 건의 하였는데 무시 당하였다.

1564년 시게하루는 동생 시게노리를 문병 한다는 핑계로 수하 16명을 의료진으로 꾸며 이나바 산성에 들어가 다쓰오키를 사로잡고 성을 탈취 하였다.

노부나가는 이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으나 시게하루는 거절하고 다시 다쓰오키에게 돌려 주었다.

“주군, 이성을 다시 돌려 드리겠사옵니다. 그대신 술과 여자를 멀리 하시고 간신을 가까이 하지말것이며 백성을 사랑 하소서.”

다쓰오키는 당장 알겠다고 하며 성을 돌려 받고는 시게하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565년 교토에서 미요시가는 제13대장군(쇼군)아시카가 요시테루(족리의휘足利義輝)와 반목하다 요시테루를 죽이고 말았다.

이를 에이로쿠의 변이라 한다.

미요시가는 요시테루의 사촌동생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를 쇼군으로 추대 하였다.

 

1567년 노부나가는 멍청한 다쓰오키를 물리치고 미노를 차지 하였다.

노부나가는 이나바 산성을 기후로 바꾸었다.

“중국 문왕의 기운이 있다는 기산(岐山)과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한자씩 따서 오늘부터 이성을 기후성(岐阜城)이라 하겠다. 또한 나는 [천하포무]란 인장을 사용 하겠다.”

천하포무는 무력으로 천하를 취한다는 뜻으로 천하통일의 야망을 드러낸 대목이다.

그는 천하통일로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노부나가는 낭인이 되어 떠돌던 시게하루를 맞아 들였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는것을 싫어하는 노부나가는 도키치로의 부대에 편입 시켰다.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족리의소足利義昭)는  에치젠 아사쿠라 요시카게(조창의경朝倉義景)의 영지로 들어갔다.

요시아키는 요시카게가 원수인 미요시가문을 치는데에 관심이 없어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요시아키는 아케치 미쓰히데(명지광수明智光秀)를 사자로 보냈다.

“요시아키님은 노부나가님께 쇼군(將軍)의 자리에 앉도록 도움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미쓰히데는 사이토 도산의 가신 이었는데 그의 사후 낭인이 되어 떠돌아 다녔다.

미쓰히데는 조정과 인맥이 깊고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노부나가의 부인 노와 사촌관계라 자신의 수하로 삼았다.

 

교토로 진출하기 위해 오다군은 미노의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를 공격했다.

오다군은 미요시가의 가신들이 배반 하도록 하여 공략해 교토로 진출 하였다.

미요시 나가야스(삼호장일三好長逸), 미요시 마사야스(삼호정강三好政康), 이와나리 토모미치(암성우통岩成友通)는 패하여 달아났다.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족리의소)가 제15대쇼군에 앉았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게 감사해했다.

“모든것이 다 그대의 덕분이다. 바라는 벼슬이 있는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노라.”

“벼슬은 필요 없습니다. 무역로를 장악하게 해주십시요.”

노부나가는 서양과 교역을 통해서 경제력을 일으켰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공격하기 위하여 교토로 불렀다.

끝내 요시카게가 오지않자 1570년 노부나가는 에치젠으로 원정을 갔다.

어릴적부터 친분이 있었던 미카와의 성주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와 연합 하였다.

이에야스군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 주인에게 충성을 하는 강군 이었다.

연전연승을 하던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은 가네가사키에서 각자의 영지로 돌려야 했다.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반을 했기 때문이다.

아자이 가문과 아사쿠라 가문은 전통적으로 동맹 관계였다.

나가마사가 오다가와의 혼인 관계로 아사쿠라가를 도와주지않자 가신들이 나가마사의 아버지 히사마사를 이용해 나가마사를 움직이게 한것이다.

아케치 미쓰히데와 기노시타 히데요시(목하수길木下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군을 맡아 간신히 막았다.

노부나가는 몇명 되지않는 수하들과 교토로 달아났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진 쇼군은 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하게 하였다.

반노부나가 세력은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 다케다 하루노부(무전청신武田晴信), 모리 데루모토(모리희원毛利輝元 ), 미요시가였다.

반노부나가 세력은 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 하였다.

 

다케다 하루노부는 너무나 유명한 장수이므로 잠깐 알아보면 출가후 법명인 다케다 신겐(무전신현武田信玄)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21년 생으로 [가이의 호랑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풍림화산 기마대로 유명하다.

우에스기 겐신(상삼겸신上杉謙信)과의 5차례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벌인다.

 

우에스기 겐신도 이시기에 유명한 무장이므로 잠시 알아보겠다.

1530년 생으로 [에치고의 용]이란 별명이 있다.

우에스기 겐신은 출가후 이름이고 그전엔  나가오 가게토라(장미경호長尾景虎()),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 우에스기 데루토라(上杉輝虎)였다. 

체격이 크지않았음에도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어 전투를 할만큼 무력이 높았고 지휘력도 좋았다.

전략이 뛰어난 반면 그대신 두통에 시달렸다.

 

아네가와강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아자이 연합군에게 고전 하지만 용맹한 도쿠가와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 시켰다.

노부나가가 셋쓰의 미요시가를 공격하는 사이 아사쿠라, 아자이, 엔랴쿠지 연합군이 오미에 쳐들어와 모리 요시나리(삼가성森可成), 노부나가 동생 오다 노부하루(직전신치織田信治)가 전사 하였다.

노부나가가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을때 혼간지의 명을 받은 나가시마 잇키가 오와리, 이세를 공격하여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오키(직전신흥織田信興)와 사카이 마사히사가 전사했다.

잇키란 저항세력이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노부나가는 조정에 압력을 넣어 쇼군의 명으로 연합군이 뒤로 물리게 하였다.

 

1571년 노부나가는 엔랴쿠지에 보복하려 했다.

“주군, 사찰을 불태우면 민심이 떠나버리고 맙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말렸다.

“재수없는 대머리야! 나는 그들에게 몇번이나 기회를 줬지만 듣지 않았단 말이다!”

노부나가는 그를 말리는 미쓰히데를 여러 무장들 앞에서 발로 차 버렸다.

결국 사찰을 불태우는 것을 실행에 옮겼다.

1572년 미쓰히데는 오미국 내에 영지를 받아 사카모토 성을 세웠다.

 

다케다 신겐이 미노로 내려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력의 차이로 패하여 간신히 달아났는데 다케다 신겐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1573년 신겐이 병사하여 다케다군은 물러났다.

다케다군이 물러나자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족리의소)를 기습하여 그를 몰아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지막 쇼군이 되었다.

얼마후 아케치 미쓰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방문 하였다.

“주베에, 노부나가는 언젠가 천황도 몰아낼 위험한 놈이다.”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요시아키는 미쓰히데에게 노부나가를 감시 하도록 했다.

“주베에, 놈이 검은 속내를 들어내면 그대가 처리해야 한다. 그것만이 천하를 안정 시키는 일이다.”

 

1573년 오다군은 아사쿠라 요시카게(조창의경)를 공격 하였다.

오다군은 아사쿠라가의 신하들을 배반시켜 공략했다.

몰리게 되자 요시카게는 자살을 했다.

오다군은 아자이 나가마사(천정장정)도 공격했다.

아자이가에 시집을 간 노부나가의 여동생 이치는 구출 되었다.

나가마사도 대세가 기울자 자살을 하였다.

나가마사와 정실부인과의 어린 아들 만보쿠마루(萬福丸)는 전쟁중에 죽었다.

노부나가가 이치를 보기위해 나가마사의 영지에 방문 했을때 가신들이 암살을 계획 했어도 나가마사는 노부나가를 보호 했었다.

아사쿠라 가문과의 동맹 때문에 노부나가를 배신한 대가로 나가마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원숭이, 이치를 구해내느라 고생 많았다. 너에게 오다니성을 주겠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군!”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영주로 만들어 주고 새로운 성(姓)을 내렸다.

니와 나가히데(단우장수丹羽長秀)와 시바타 가쓰이에(시전승가柴田勝家)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기노시타를 하시바(우시羽柴)란 성으로 바꿨다.

이치는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차차(요도)란 딸을 낳았다.

 

1574년 다케다 가문을 물려받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쳐들어 오자 노부나가는 충돌을 피하여 기후로 군대를 돌렸다.

나가시마 문도를 공격하다 노부나가의 형인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히데나리(織田秀成)를 잃었다.

그대신 반란군을 싹쓸어 잠재워 버렸다.

 

1575년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가를 배신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貞昌)를 공격하려다 노부나가의 군대와 마찰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은 가쓰요리의 기마대가 내려오는 좁은 길목에 목책을 쌓고 조총으로 공격 하였다.

일본의 기마대는 유목민족과 중국의 기마대와 달리 말을 타고 싸우지 않고 말을 타고 전장으로 간후 말에서 내린뒤 전투를 벌였다. 

기동성이 뛰어난 보병대라고 보면 된다.

일본은 산간지형이라 그런 특성이 생긴것으로 보아진다.

이전투에서 가쓰요리는 패하였고 풍림화산 기마대란 이름으로 전국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군대를 물리친 노부나가에게 자신감만 불어넣어 주었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을 정벌하여 시바타 가쓰이에 북국 군단을 편성 하였다.

 

노부나가는 장자인 오다 노부타다(직전신충織田信忠)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1576년 아즈치성을 짓기 시작하여 1579년 웅장한 규모의 성을 완성했다.

천황이 되기위한 야심을 드러낸 대목 이었다.

 

당시 일본의 군대에 여자가 있으면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남색이 유행 하였다.

노부나가는 그의 비서인 호리 히데마사(굴수정堀秀政), 모리 란마루(삼란환森蘭丸)를 이용해 욕구를 해결했다.

 

1576년 우에스기 겐신을 맹주로 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이 다시 형성 되었다.

1577년 시바타 가쓰이에는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상삼겸신)에게 공격을 받아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 하였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우시수길)에게 지원을 명했다.

가쓰이에는 타고난 무장이고 히데요시는 주로 전략을 쓰는 장수라 가쓰이에는 히데요시를 무시 하였다.

히데요시는 사이가 좋지않은 가쓰이에를 구원하고 싶지 않아 노부나가의 명을 어겼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명은 잘못된 것이라도 부하들이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누구라도 처단하려 했다.

“원숭이, 네 마음대로 가쓰이에를 지원하지 않다니! 내 명을 어기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주군! 후방에도 위험이 있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반란의 뜻이 없음을 해명하였다.

결국 시바타 가쓰이에가 겐신에게 패하자 노부나가는 지원군을 다시 돌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마쓰나가 히사히데(송영구수松永久秀)는 노부나가를 배신 하였다.

노부나가는 배신자 히사히데를 공격하여 히사히데는 죽고 말았다.

 

1578년 노부나가에게 운이 좋게 우에스기 겐신도 갑작스럽게 죽었다.

겐신은 진지내 변소에서 쓰러져 죽었다.

겐신이 결혼을 하지않아 자식이 없고 양자만 있었는데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에스기가에는 혼란이 일어났다.

자연스레 노부나가 포위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영지가 넓어지자 여러방면에 군단을 형성 하였다.

우에스기 가게카쓰(상삼경승上杉景勝)은 시바타 가쓰이에가 견제하고 주코쿠(중국) 방면은 하시바 히데요시, 시코쿠(서국)은 니와 나가히데가 맡았다.

노부나가의 군단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영지를 계속 넓혀 천하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노부나가를 유일하게 막을수 있던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사라지자 이제 남은 위협은 모리군과 호조군 정도였다.

오다군이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직업군인제도를 들수 있다.

당시 일본은 반농무사로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농번기를 피해 전쟁을 벌여 농민이 군대에 소속되었는데 노부나가는 전쟁의 경험이 많은 병사를 정예군으로 데리고 있었다.

 

아라키 무라시게(황목촌중荒木村重)가 배반하자 히데요시는 그의 부하 구로다 요시타카(흑전효고黑田孝高 = 구로다 간베에 : 흑전관병위黑田官兵衛)를 보내 항복 하도록 만들었다.

오히려 요시타가는 사로잡혀 감옥에서 생활하게 된다.

노부나가는 요시타카가 돌아오지 않자 배신을 한줄알고 그의 어린아들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黑田長政)를 죽이라고 히데요시에게 명했다.

다케나카 시게하루가 히데요시를 말렸다.

“히데요시님, 간베에님에게 무슨일이 생긴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도 간베에가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러나 주군의 명이 떨어진 이상 듣지 않으면 내목숨도 위험해!”

시게하루는 가짜목을 보내게하고 어린아이를 살려 두었다.

1년후에 오다군은 무라시게를 무찌르고 요시타카를 구출한다.

요시타카는 자신의 아들을 살려준 시게하루에게 고마워 했다.

요시타카는 오랜 감옥생활로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다.

 

시게하루는 몸이 약하고 병을 앓고 있어서 히데요시가 쉬게 하였지만 전장에서 죽기를 원했다.

시게하루는 죽어가면서 히데요시에게 요시타카를 중용하라 권했다.

“히데요시님, 저는 먼저 가시만 간베에님은 생각이 깊어 히데요시님의 앞길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모든일을 그와 상의 하십시요.” 

 

1579년 노부나가는 자신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장남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송평신강松平 信康 )와 이에야스의 처인 쓰기야마에게 처형을 명했다.

적과의 내통 혐의가 그이유이다.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당연히 반대 하였지만 노부나가와의 충돌을 피하고 싶은 이에야스는 명을 따랐다.

 

1580년 오랫동안 오다가문에서 일한 중신 사쿠마 노부모리(좌구간신성佐久間信盛)를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추방했다.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안도 모리나리(안등수취安藤守就)는 과거에 배반 했다는 이유로 추방시켰다.

그러나 가쓰이에는 능력이 뛰어나 추방시키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무능력하고 권리만 누리려는 가신들을 정리하여 공을 세우고 능력이 있는 자에게 영지를 나눠주려 한 것이다.

옆에있던 가신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능력이 없으면 자신들도 언젠간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1582년 노부나가는 연합군을 형성해 다케다 가쓰요리를 공격했다.

전황이 불리하자 다케다가의 무장들은 앞을 다투어 항복을 하였다.

노부나가는 손쉽게 다케다령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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